上古時代 보신탕의 기원 - wookay/kbyon GitHub Wiki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대하여

  1. 보신탕의 기원

한반도와 중국에서는 기원전 상고시대부터 전통적으로 개를 잡아먹는 전통이 전해지고 있다. 이 개고기를 몸을 보(補)하는데 좋다고 하여 일명 "보신탕(補身湯)", 또는 북한에서는 "단고기"라고 부르는데, 유럽을 비롯한 서양인들이 보면 어찌 사람과 가장 친한 친구나 다름없는 가축을 잡아먹을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막상 한반도에서는 말(馬)은 우두머리로 여겨 말고기를 먹지 않는 전통이 있으며, 특히 새끼를 낳은 어미소는 인간과 똑같다고 해서 인도의 전통처럼 잡아먹지 않는 전통이 있다.

일반적으로 집에서 가축을 기르게 된 동기는 주변에 두고 먹이를 주어 기르면서 때가 되면 그 가축을 죽여 고기를 식량으로 삼기 때문인데, 상고시대에는 동서양 모두 짐승의 고기를 먹는 습성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요서와 강남, 섬서 지역에서 벼와 밀, 콩을 재배하면서 고기보다 풀, 즉 벼(쌀)와 콩(메주)을 익혀 먹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에는 동양에서는 주로 벼를 중심으로 하는 채식(菜食)이 전통이 되었고, 서양에서는 그대로 고기를 중심으로 하는 육식(肉食)이 전통이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동양에서 벼(禾) 이전에 주식으로 생산되었던 기장(黍, 수수), 귀리(燕麥), 보리(麥)들이 그대로 생산되어 이것을 고기와 함께 주식으로 하였다. 밀과 옥수수는 늦게 생산되기 시작하는데, 중국에서도 동쪽은 벼, 서쪽으로는 밀이 재배되며, 기장, 귀리, 보리는 가뭄때 벼를 대신하는 부황작물이었으며, 주로 짐승의 사료로 사용되었다.

한반도에서 고기로 먹는 가축은 크게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세 종류이고, 나머지는 모두 생선 등의 해산물이 차지하고 있다. 특히 소고기는 중성, 돼지고기는 음성, 닭고기와 개고기는 중성, 소고기와 개고기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육질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특히 개고기는 몸이 허약한 사람에게 원기를 보충하는 보약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보신탕이라 이름 지은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이들 가축들의 사료를 서양과는 다르게 항상 사람이 먹는 것과 똑같게 사철에 맞추어 조리를 하거나 익혀서 사료로 하였다. 그만큼 이들 가축들을 인간과 똑같게 다루면서 그 고기를 식량으로 삼은 것인데, 이 개고기만큼은 육식을 주식으로 삼는 야만적인 서양인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신당서(新唐書)에 이런 기록이 있다. 태원(太原)의 풍속에는 부도법(浮屠法)이 있어 죽은 사람을 묻지 않는다. 주검은 교외에 버리고, 새나 짐승이 먹는 대로 내버려 두는데, 이런 장소를 황갱(黃坑)이라고 한다. 개가 항상 수백마리씩 떼지어 다니면서 사람 고기를 먹어봐서 지나가는 사람까지 해를 끼치는 일이 있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런 사정으로 개에 대한 욕이 욕 중의 욕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런 장법(葬法)은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중원을 제패할 당시에도 매우 흔하게 행하여졌으며, 헌원의 무덤도 처음에는 이처럼 목곽(木槨) 위에 올려진 풍장이었다. 지금 알려져 있는 황제의 봉토분은 후대에 다시 만든 것으로, 옛날에 지진으로 장지인 교산(橋山)이 무너지면서 헌원의 무덤이 드러났을 때 묘는 비어있고 주검도 없이 단지 검자루(劍(口+老))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서는 헌원의 무덤이 처음에는 풍장 시설로서, 그의 옷가지가 남아있었다고 하는데, 또 다른 기록에서는 치우와 비슷하게 신하들이 보는 자리에서 단지 활만 남기고 용을 타고 승천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옷가지와 검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헌원의 풍장 시설도 후대에 전시용으로 만든 것에 불과하며, 후대에 묘를 새로 조성하면서 묘 안에 검만 안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헌원이 있을 때가 동이의 신시(神市) 시대 말기로서 이 당시에 한반도에서도 이같은 풍장의 일종으로 고인돌이라는 돌 제단을 만들어 덮개돌 위에 시신을 방치하여 새와 들짐승들이 쪼아먹도록 방치하였다가 뼈가 남으면 그 뼈를 수습하여 무덤방 안에 모아 놓았다가, 나중에는 뼈와 시신을 무덤방 안에 들여넣는 장법(葬法)으로 바뀌었는데,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삼만기에 달하는 고인돌이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돌무덤들이다. 나뭇가지와 지푸라기로 감싸 초분(草墳)으로 가매장 하였다가 삼년이 지난 후에 정식으로 봉토분을 만들어 뼈만 추려 매장하는 세골장(洗骨葬) 장법도 이 고인돌 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풍장(風葬)에서 주검을 땅 속에 파묻는 매장(埋葬)으로 바뀐 것으로 보여지는데, 개에 대한 기록은 주역(周易)과 사기(史記)에서도 초복에 개를 놓아 벌레를 없앤다는 말이 있고, 그 전부터 제사용으로 개를 잡아 하늘에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어, 개고기를 먹는 습성은 상고시대부터 계속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개가 사람 주변에서 주인을 보호하고 주인의 지시를 따르는 가축이 된 것은 상고시대부터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리저리 철따라 옮겨다니는 유목민들에게는 개가 어느 가축보다도 중요한 짐승으로 다루어지지만 집단으로 모여 사는 농경민에게는 개가 개인적으로 살붙이같은 중요한 가축이 되지 못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는 바로 이 사소한 문제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러니까 서양인은 아직도 상고시대 그대로 유목민의 습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서로 따로따로 흩어져 살면서 개를 친자식처럼 받아들였지만, 동양인은 벼를 중심으로하는 채식을 하면서부터 서로 낫선 사람들도 함께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에, 개가 유목민처럼 직접적으로 사람의 절친한 친구 역할은 하지 못하고, 그저 마을에 들어오는 낫선 침입자로부터 집과 마을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로 존재하였다. 이런 차이는 동양과 서양의 명견 특성에서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으며, 아직도 유목으로 생활하는 만주 북방, 시베리아 지역과 몽고 지역에서는 개가 서양처럼 개인적인 살붙이가 되는데, 유럽에서도 이같은 특성이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개를 먹는 사람들이 주변의 온갖 개를 몽땅 잡아먹는 것으로 오해하면 큰일 난다. 옛날부터 잡아먹는 개는 자기가 기르거나 주인이 있는 개가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산야를 돌아다니는 주인 없는 개만 한정하였으며, 근간에는 '도사견'이라 하여 사람이 잡아먹을 수 있는 개를 따로 양식하여 보급하고 있다. 주검을 그대로 내버려 개 먹이가 되도록 하였던 시절에도 공자(孔子)는 자신이 기르던 개가 죽자 무덤을 만들어 개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였는데, 공자는 동이족의 후손이자 동이의 예(禮, 葬禮)를 중원에 보급한 고대 최고의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1)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제사상을 보면 과거의 가장 좋은 음식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의 젯상에서 조상에게 바치는 가장 으뜸되는 음식은 푹삶어 고아놓은 돼지 머리이며, 그 옆으로 쌀을 빚어 만든 떡과 술, 나머지는 건어물과 과일에 불과하였다. 상고시대에는 콩(豆)과 돼지 머리가 주요 제물로 나타나는데, 비록 채식을 위주로 하여 단백질은 부족하였지만 콩을 곰삭혀 만든 된장, 고추장, 간장으로 대신 보충하였다. 옛부터 한반도에서는 돼지 고기와 닭고기는 손님이 오면 먹을 수 있는 특별 요리에 해당하였으며, 일년내내 별다른 육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더운 여름날에 벼농사를 하면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하여, 한참 더운 삼복날에 이같은 보신탕을 먹는 전통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무덤 안에 주검을 매장을 하면서 온갖 악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쉽게 상할 수 있는 육식에서 벗어나 신선한 채식을 택하고 야채를 함께 섞어 끓여먹는 탕을 만들어 먹으면서 더욱 더 모든 악마에게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03-05-06 발표, 2003-06-26 수정)

  1. 연금술의 왕국, 조선 (上古時代 - 연금술의 왕국, 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