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時代 韓國 民族의 起源 - wookay/kbyon GitHub Wiki
- 한국(韓國) 민족(民族)의 기원(起源)
한반도가 서양의 무력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된 지 반세기가 지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과거처럼 조선(朝鮮)과 한(韓)의 두 나라가 되었지만 조상 대대로 원래는 남북이 하나로 뭉쳐진 단일민족입니다. 즉 동이족(東夷族)이 그 근원인데, 동이는 중국 중원에서 보아 해뜨는 동쪽 민족, 즉 과거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비롯하여 만주와 연해주에 근간을 두었던 발해 지역까지 포함한 민족을 통칭하는 말로, 지금의 한반도와 북경 동쪽의 요서, 요동, 만주 그리고 러시아 동단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구이(九夷)는 동이와 동등시했거나 또는 동이에서 파생된 민족을 일컫는데, 그 근간을 구환(九桓)의 후예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복희와 치우가 만주에서 산동으로 진출한 이후 산동과 안휘 등의 회대(淮岱) 지역이 동이족이 되어 이들 대부분 복희와 치우의 후손으로 자랑하게 된 것으로, 즉 단군조선 당시 하(夏)의 우왕(禹王)이 나온 이후에 한반도를 포함한 요녕성, 산동성, 안휘성, 절강성 등의 황해 연안 지역이 모두 동이 또는 구이의 영역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동이의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단군조선 이전에는 신시(神市) 청구국(靑丘國)이 있었고, 그 이전에 환국(桓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환국 당시에도 구환(九桓)이 있어 지금의 강남(江南) 묘족(苗族)이 구환 가운데 하나인 묘환(苗桓)에 해당합니다. 이렇듯이 구이의 근간인 구환의 자취를 살펴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일본 구주, 중국 절강성, 화북성, 사천성, 서장의 티벳, 부탄, 인도 북방의 앗삼, 간다라 지방으로 이어지면서 한반도의 상고문화흔적이 남아 있으며, 북으로는 러시아 동단의 하바롭스크, 몽골 북방, 바이칼 호수, 알타이 고원으로 이어져 그 서쪽 끝이 지금의 이란 고원과 터어키 고원 지대에서 합류하게 됩니다. 즉 태초에는 해뜨는 동쪽 끝이 두만강 유역이었고, 해지는 서쪽 끝이 사천성과 이란 지역에 해당합니다. 러시아 남방의 바이칼 지역과 알타이 지역 모두 한대(漢代) 무렵에는 북이(北夷) 또는 북적(北狄)으로 불렀는데, 산해경에서 말하는 중국 북서쪽의 숙신(肅愼)과 백민(白民), 그리고 정령국(釘靈國)이 아마도 이 일대에 해당할 것입니다.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사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거의 대부분 유목 민족으로서 수시로 나라를 이리저리 옮겨다녔기 때문에 두만강 유역에 근간을 두었던 숙신과 백민도 한대(漢代) 이전에 서쪽으로 이전하면서 서방에서 동진하던 백계 러시아(Belarus) 민족과 융합하여 알타이 일대에서 안드로노보(Andronovo)와 카라숙(Karasuk) 문화를 이룩하고, 그후 한대(漢代) 들어 현재의 바이칼 호반에 정령국이 자리 잡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
이러한 사실은 알타이와 바이칼 일대에서 발견된 신석기와 청동기 유적과 유물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특히 알타이를 비롯한 시베리아 전역에서 발견된 모든 석조물과 돌무덤들은 모조리 선돌(立石), 돌널무덤(石棺墓) 또는 그로부터 파생된 둘레돌(護石, 環狀列石) 양식을 보이고 있어 이들 유적 모두 만주와 한반도에서 성행하였던 고인돌(支石墓) 이후에 나타나는 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더군다나 알타이 일대에서 발견되는 모든 청동기도 사실상 은대(殷代) 청동기 이전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어 필자는 은대(殷代) 무렵에 요녕성의 동이와 섬서성, 감숙성의 서이의 영향으로 알타이 청동기가 형성되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3) 이런 점을 중국의 사서와 각종 문헌에서도 누누이 말하여 왔는데, 즉 중국 화하족(華夏族)의 조상은 동이이며, 북이는 동이에서 파생되었고, 북방과 서방을 주름잡던 흉노족 또한 그 조상을 동이에 두고 있으며, 검(劍)은 만주 동이족인 치우에게서 비롯하였고, 그후 칼(刀子)이 서이(西夷)의 수인씨(燧人氏)에게서 비롯하였다고 말입니다. 또 북이는 북호(北胡)와 북적(北狄), 즉 동호(東胡)의 후예를 뜻하는데, 동호는 한무제 당시 구려(句麗)에서 갈라져 나간 동이족을 말하며, 이런 과정이 여러번 거듭되면서 동호의 갈래인 돌궐(突厥)이 탄생하여 오늘날의 터어키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남한은 선사 시대에 어떤 역사가 있었을까요. 여러 문헌을 종합하면 이렇습니다. 남한의 남해안은 중국의 절강성과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원래 일본의 구주(九州) 섬 북방과 함께 남이족(南夷族)의 동쪽 끝 영역이었다가 한반도 남해안과 중국 절강성, 일본 구주가 분리하는 시기에 단군조선이 세워지면서 요동(遼東)에 근거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에서 강화도(江華島)의 남이를 정벌하고 마니산(摩尼山, 摩璃山)에 참성단(塹城壇)을 쌓게 되었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한반도의 남북이 합쳐져 북쪽 지역은 청천강 이북까지 단군조선이 영역을 넓히고, 남쪽 내륙은 단군의 후예들이 배달(倍達)의 청구국(靑丘國)을 이어받아 남쪽의 청구국을 세우게 되어 단군조선이 세워지면서 한반도가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삼조선(三朝鮮)으로 확충되면서 북쪽으로는 요동의 진조선(眞朝鮮), 서쪽으로는 산동의 번조선(番朝鮮), 남쪽으로는 막조선(莫朝鮮)이 됩니다.
그리고 산해경을 살펴보면 이때를 즈음하여 한반도 남쪽 해안에서는 환두국(驩頭國)과 대인국(大人國)이 세워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남해안 일대의 여러 풍물과 전설을 참고하면 요순시대(堯舜時代)에 남해안 일대에 대인국과 환두국이 존재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환두국이 주도를 하여 남한 지역에는 막조선을 이어받아 마한(馬韓)이 세워지게 되는데, 환두는 곧 마한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후 단군조선의 영역이 황해 연안 전체로 확장되었는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들어서 오월(吳越)이 등장하면서 중국이 흥하고 동이가 쇠약해져 은(殷)나라 주(紂)의 신하이었던 기자(箕子)가 동이로 망명하여 당시 북경 동쪽 요서(遼西)에 있었던 번조선(番朝鮮)을 맡아 다스리다가 드디어는 기자 후손이 만주의 진조선(眞朝鮮)까지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연왕(燕王) 노관(盧관)이 흉노(匈奴)로 망명하자 그의 부하인 위만(衛滿)이 살금살금 조선의 왕권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당시 수유후(須臾侯)이자 조선의 왕이 었던 기자 후손의 기준(箕準)은 조선의 왕위를 위만에게 던져주고 바다를 건너 마한으로 들어가 한왕(韓王)이 되었으며, 한(韓)의 왕 기준(箕準)이 죽은 다음 왕위는 다시 마한에게 넘어갔습니다. 물론 북쪽의 만주에서는 단군조선이 망해가자 단군 왕실의 후예인 해모수(解慕漱)가 기자 후손들과 약속하여 유민을 모아 부여(夫餘, 北夫餘)를 세우게 된 것이지요. 그후 진시황(秦始皇)이 중국 내륙에서 동이를 몰아내고 강력한 통일정책을 펼치자 과거 중국으로 들어가 중국 각 지역에서 왕족과 귀족이 되었던 동이족들이 진시황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다시 한반도로 이주하여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한에서는 중국의 이주민들에게 마한 동쪽을 떼어주어 진한(辰韓)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하였는데, 이 진한이 점차 성장하면서 마한에서 독립하여 신라(新羅)를 세우게 되었으며, 이들이 과거 대인국(大人國)의 후손이었던 변한(弁韓)과 가야(伽倻)를 흡수하게 됩니다. 그러자 신라에게 밀린 가야의 귀족들이 바다를 건너 일본 열도에 들어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구주(九州)의 왜국(倭國)을 대신하여 일본(日本)이란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 때문에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 남북 분리에 찬동하였던 일본 학자들이 여론을 주도하면서 남쪽은 한(韓), 북쪽은 조선(朝鮮)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결과적으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었는데, 이 당시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가운데 식민주의와 사대주의 성향의 일부 학자들은 이에 한발 더 나아가 진한(辰韓)과 신라(新羅)의 근본을 마한과는 근본이 전혀 다른 중국 바깥의 몽고, 알타이 또는 바이칼 인근으로부터 유입된 기마민족(騎馬民族)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북방의 기마민족 대부분은 북이의 동호(東胡)와 말갈(靺鞨) 특징을 공통적으로 갖고있으며, 따라서 가야와 신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마 문화는 동호의 후예들이 남긴 흔적으로 볼 수 있는데, 동호는 원래 단군조선의 무사계층(武士階層), 즉 왕을 보좌하기 위하여 검을 받드는 귀족 출신이어서 그 후예들이 세운 가야와 신라는 무사 계층이 주도한만큼 검과 더불어 기마족 특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이같은 특징이 알타이 지역과 더불어 과거 서이의 영역이었던 감숙성 일대의 월지(月氏, 月支)와 월지의 후예이었던 천산산맥 서쪽의 카자흐스탄 이색(伊塞, 이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호의 근본이 구려이며, 구려는 다시 그 근본이 부여와 신시 청구국에 있는지라, 이들 모두 그 뿌리가 동이족임을 말하고 있습니다.(4)
즉 중국 사서와 고대 문헌에서는 한반도의 동이민족이 북이 또는 남이, 또는 기타 어디든지 외지로부터 유입된 민족이라는 말이 없었으며, 더구나 중국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던 한사군(漢四郡)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민족 대부분이 만주와 한반도 동이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세워지게 되었다고 누누이 말해 왔으며, 이에 한발 더 나아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비롯한 동이의 여러 문헌에서는 전 세계 여러 민족의 조상이 바로 동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해왔습니다. 물론 전 세계에 막강한 위력을 떨쳤던 징기스칸의 몽고제국 시대에도 한반도는 인류 기원의 무지개가 피어났던 무지개의 나라, '소롱고(5)'로 부르면서 아시아 대륙 대부분을 병합하여 그들의 휘하에 두면서도 오로지 한반도 만큼은 고려(高麗)라는 독립국으로 존속하도록 하였습니다. 단군세기에서도 몽골(蒙古)의 조상은 단군 초기에 동이로부터 갈라져 나갔다고 말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으며, 인도의 무굴 제국도 자신들의 문화 근원을 한반도로 말했었으며(6),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함께 아우렀던 막강한 오스만 터어키 제국에서도 오로지 한반도 만큼은 자신들의 조상 나라로 확인하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2004-09-08 발표)
(2) 고인돌은 황해도에 있었던 군자국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하였다. 과거 북한학자들이 고인돌을 황해도 장산곶을 통하여 외지로부터 유입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유럽에서 공부하였던 도유호의 판단 오류가 틀림없다. 또한 일본 학자는 구주에서 세계의 고인돌 양식이 비롯되었다고 말하여 이를 유럽 학자들이 받아들인 적이 있으나, 그의 주장은 자신들의 구주 고인돌만을 근거하여 아전인수격으로 말한 것으로, 지하의 남방식에서 지상의 북방식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 것인데, 구주 지역의 고인돌 분포가 한반도와 인접한 구주 북방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으로 여기게 되었다.
(4) 중국 문헌에서 가끔 중원의 뿌리를 북방으로 말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로지 요서와 내몽고 지역의 요(堯)와 동호(東胡)를 말한 것이다. 그밖의 경우는 아마도 기후 변화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 즉 산해경에 나타나듯이 상고 시대에 중국 북방의 시베리아 지역에는 여러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어느 시기에 북방 기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이들 대부분이 중국으로 들어가거나 또는 유럽 등지의 사방으로 흩어져 결과적으로 지구상의 문화를 일시에 변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서 이들 북방민족을 한반도 민족의 원류로 말한 문헌은 없으며, 더군다나 고구려 시조의 출신지로 일컫는 북이도 단지 만주 북방의 흑룡강 지역을 일컫는 말일 뿐이다. 이같은 사실은 고인돌을 비롯한 돌무덤의 양식에서 너무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5) 소롱고는 서리국, 시라국, 아라국과 통하여 본래는 오랑캐를 뜻한다. 오랑캐는 오색 무지개 빛에 둘러싸여 태초인류가 된 것에서 비롯하여 무지개가 피어나는 나라를 일컫는 말이 되었는데, 무지개는 곧 금 또는 구리 금속을 뜻하여 결국 금(구리)이 변하여 사람이 된 것을 말한다. 즉 오랑캐는 금성(金城) 또는 금국(金國)으로 바꿔 말할 수 있는데, 신라(新羅)라는 말도 금국, 즉 쇠나라에서 비롯한 말로, 이 말은 처음 만주 하얼빈에 근본을 둔 진한(辰韓, 眞朝鮮)에서 비롯한 말이다. 진(眞)은 진(辰)과 통하여 신(新)이 된다. 상고 문헌에서 말하는 부상(扶桑)은 지금의 금강산(金剛山)의 모체(母體)를 이루었던 청색 용암 기둥을 일컫는 말인데, 인류를 태동시킨 꽃같은 무지개가 바로 이 부상에서 피어나는 무지개 꽃을 말함이다. 즉 처음에는 황해도에 자리한 군자국(君子國)에서 동쪽의 부상(扶桑)에서 피어나는 무지개 꽃을 무궁화라 불렀으며, 이를 후세에는 연꽃으로 불러 불교에서 이를 받아들이고, 만주에서는 이를 모란꽃으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동식물 대부분은 태초 당시 분출되는 용암이 주변과 융합하면서 새로운 갈래가 되어 그 가지를 다양하게 뻗어나간 것으로 여겨진다.
- 신명(神明, Light Ball) (上古時代 - 神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