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古時代 夏 나라 이전의 檀君朝鮮 - wookay/kbyon GitHub Wiki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대하여

  1. 하(夏) 나라 이전의 단군조선(檀君朝鮮)

기원 후 한반도의 고대 역사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시대(三國時代)로 통칭하고 있으며, 그에 덧붙여 나중에 신라에 의하여 복속된 가야(伽倻)의 여러 소국들을 포함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반도에서 기록과 유물을 통하여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고대 국가로서, 우선 고구려, 백제, 신라를 꼽고 있으며, 이들 삼국은 각자 지도부가 서로 달라 다른 나라로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었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기원전의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는 고조선(古朝鮮) 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 두리뭉실하게 얼버무리며 통칭하고 있는 형편이다. (1) 그러나 동이(東夷)의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하여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는 이 시대에 한반도와 요동에서 매우 독특한 국가 체제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간간이 언급을 하고 있다.

즉, 삼국시대 이전에는 삼한(三韓)이 통치하는 삼조선(三朝鮮)이 있었는데, 이 삼조선은 진조선(辰朝鮮), 번조선(番朝鮮), 막조선(幕朝鮮)으로서, 이들 세 나라를 각각 진한(辰韓), 번한(番韓), 막한(幕韓)이라고 불리는 3명의 단군임금(檀君王儉)과 여러 군장(君長)들이 통치하였으며, 환웅(桓雄)이 이들 여러 임금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왕검(王儉)은 '임금'이라는 한글의 음역(音譯)으로서,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땅(地, 檀, 達)을 다스리는 군주이며, 환웅(桓雄)은 하늘(天, 桓, 韓)을 다스리는 군주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들 삼한(三韓)은 각각 처음부터 발해(渤海)로 불려졌던 황해(黃海)의 연안에 영토를 두었는데, 번조선은 연(燕) 나라의 땅이었던 현재의 북경(北京) 근처의 하북성(河北省) 일대와 요서(遼西) 지역, 진조선은 요동(遼東)과 만주(滿洲) 일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막조선은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으나 아마도 과거의 마한(馬韓) 지역인 현재의 남한지역이었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그러다가 지구대격변(地球大激變)과 함께 9년간의 대홍수(大洪水)가 일어나면서, 중국(中國)의 중원(中原) 지역이 모조리 바닷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 이후에 물이 빠지면서 황하의 물줄기가 바뀌면서 중원 지역이 새로 만들어지고, 해마다 황하의 물줄기가 바꿔지게 되면서, 현재처럼 황하 하류 지역에는 황토(黃土)가 수십미터 높이로 쌓이면서 광활한 중원이 형성되었다. 이 때 가서야 중국의 중원에서는 가까스로 나라라는 것이 성립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우왕(禹王)이 세운 하(夏) 나라로서, 이 당시 요동과 한반도는 삼조선(三朝鮮) 이전의 전기 고조선(古朝鮮) 시대에 해당한다. 우(禹)는 동이족 출신인 순(舜) 임금의 신하이었는데, 현재의 상해(上海) 부근의 도산(塗山), 즉 홍수로 인하여 진흙탕으로 뒤덮인 회계산(會稽山)에서 단제(檀帝, 天帝)가 보낸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만나 회합(會合)하였고, 부루를 통하여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가 적혀진 황제중경(黃帝中經)이란 책을 얻어가, 전에 쌓았던 적석산(積石山) 제방이 다시 무너지자, 황하의 물길을 그대로 놔두면서, 자연적으로 황하의 치수(治水)에 성공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우(禹)는 치수의 공(功)을 단제(檀帝, 天帝)에게 인정받아 하(夏)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이 하(夏) 나라가 중원이라는 신대륙에 들어와 처음으로 세워진 나라로서, 하(夏) 나라의 종족을 화하족(華夏族)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화하족이 중국 본연의 한족(漢族)의 기반을 이룬다.

요(堯)는 도당(陶唐) 나라의 임금이었고, 순(舜)은 유우(有虞) 나라의 임금이었으며,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신농국(神農國), 그리고 상(商) 나라와 함께 현재의 태행산(太行山)에서 북경 북쪽의 연산(燕山) 일대, 그리고 산동(山東) 지역에 흩어져 있었는데, 대홍수 이후에 이 모든 나라들이 충돌하면서 수시로 변화가 매우 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요서 북방과 요동 지역,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홍수의 영향을 그다지 받지 않은 관계로 나라가 안정되어 있어, 대홍수 이후에 새로 넓혀진 황해(黃海) 연안 지역을 진번조선이 우선적으로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황하의 물줄기가 산동 북쪽으로 바뀌면서 산동(山東) 남쪽의 연안(沿岸) 지역도 진번조선(眞番朝鮮)에서 차지하게 되었고, 중원의 구주(九州)를 감독할 낭야국(琅邪國, 現 大汶口 근처)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2) 나중에 다시 옛부터 동이족(東夷族)이 건너가 곳곳에 거주하였던 발해 연안 지역을 고구려(高句麗)에서 다시 한번 차지하게 되었으며, 남이족(南夷族)이 거주하였던 오월(吳越) 지역도 나중에 다시 점유(占有)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영토로 삼게 된다. 이 때 오월(吳越) 지역은 백제군(百濟軍)의 힘으로 평정되었는데, 백제는 고구려의 아우(弟)가 되는 나라로서, 군 병력을 형(兄)에게 빌려준 셈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나라에 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나중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삼묘족(三苗族)은 원래 북방의 동이족에서 분리된 동이의 일파로서, 주로 남해(南海)와 장강(長江, 揚子江) 하류 일대에서 남이(南夷)를 형성하다가 나중에 황해(黃海) 연안(沿岸)과 중원(中原) 지역으로 확산되어 화하족(華夏族)과 더불어 한족(漢族)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어쨌든 하(夏) 나라의 우왕(禹王) 이전에는 이 산동의 서쪽 지역을 헌원(軒轅)이 차지하면서 치우(蚩尤)와 대립하여 전쟁을 여러 차례 치렀는데, 치우가 사고(事故)로 죽으면서, 황하 하류 지역을 헌원(軒轅)이 차지하여, 그후부터 황제(黃帝)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때 중원에서는 동이족을 이겼다는 기념으로 응룡(應龍, 黃龍)을 만들어 축제를 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폭죽(爆竹)이 발명되면서 이천년을 넘게 중원(中原) 한족(漢族)의 전통을 이루게 된다. 이 때 치우는 배달(倍達)의 군장인 환웅(桓雄)으로서, 처음으로 구리와 철을 캐내어 병기(兵器)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그의 휘하에 요서(遼西)에는 대요(大撓)와 산동(山東)에는 창힐(倉힐)을 두었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치우가 죽으면서 창힐은 헌원의 휘하에 들어가 창힐은 중원에서 글자(契, 書)의 창시자(創始者)로 대접받게 된다.

하후씨(夏后氏, 夏) 나라 이후에는, 서쪽의 상(商)과 동쪽의 은(殷) 나라를 거쳐, 주(周) 나라 말기(末期)에 이르러 이족(夷族) 출신인 정(政)이 옛 영토에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周, 西周) 나라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진(秦) 나라를 세우게 되었는데, 대홍수 이후에 다시한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는 혼란기를 틈타 중원이라는 신대륙(新大陸)에서 새로이 형성된 중원 지역의 6개국을 모조리 병합하면서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다. 그후에 다시 발해(渤海)와 황해(黃海) 연안의 동이족(東夷族)들을 모조리 병합하게 되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발해와 황해 연안에 거주하였던 단군 휘하의 동이족의 여러 귀족들이 수하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한강(漢江, 漢水) 이남의 남한(南韓)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길림(吉林) 지역의 부여(夫餘)에서도 남한의 마한(馬韓) 땅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과거의 진조선과 번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남해안으로 이주하여 각각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우게 되어, 다시 한반도에서 삼국(三國)이라는 삼위일체(三位一體) 방식의 통일(統一) 체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구려와 백제, 신라는 각기 다른 나라로 알고있지만, 실상은 통일된 조선(朝鮮)이라는 한 나라에서 연방국(聯邦國)의 주(州)처럼 정치적으로 지역적으로 구분되어 유지되었는데, 이 구분을 중국의 사가(史家)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오늘날까지 혼란을 가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요동과 한반도에 산재한 고인돌의 분포를 보면, 전기(前期)의 양식(樣式)은 황해도(黃海道), 요동(遼東), 길림(吉林)의 세 지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고, 후기(後期)의 양식은 요동(遼東), 북한(北韓), 남한(南韓)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형식상 후기에 산동지역이 포함되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이 산동 지역이 포함되면서 동이족이 중원의 화하족과 충돌하게 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중원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돌무덤은 오로지 돌널무덤(石棺墓)이거나 후기(後期)의 돌방무덤(石室墓)이며, 이와 더불어 봉토분(封土墳)이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 동이족의 흔적을 보이고 있으며, 진시황(秦始皇) 이후에 가서야 중원에서는 돌방무덤(石室墓)의 양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원래 중원의 무덤 양식은 황토를 깊숙하게 파고 들어가거나, 굴을 'ㄴ'자 형으로 파고 들어가 주검을 매장하였으며, 아니면 애초부터 주검을 그대로 버렸는데, 산동(山東) 남부 지역의 이층대(二層臺) 무덤 양식은 분명 한반도 남부의 이단토광묘(二段土壙墓)에서 그 규모가 커졌다고 할 수 있으며, 은허(殷墟)의 무덤도 이와 관련되어 나온 무덤 양식이다.

이렇듯이 중원의 화하족(華夏族)은 원래 매장(埋葬)에 관심이 없는 종족이었는데, 동이족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원에서 조상숭배(祖上崇拜)와 제사(祭祀), 그리고 매장(埋葬)의 관습이 형성되었으며, 한반도의 동이족처럼 삼신사상(三神思想)이 깃들여졌다. 그래서 동이의 한반도에서는 전통적으로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고, 그 대신 중원에서는 진(秦) 나라 이후에 사방의 사이족(四夷族)을 제압하면서 사방관념(四方觀念)이 형성되어 중원에서는 4라는 숫자를 즐겨 이용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01-10-02 발표, 2003-03-14 수정, 2004-08-06 주석보충 )


(1) 단군조선과 고조선을 구분하여 말했으나 이는 필자의 착오로, 평양성에 처음 나라를 세울 때부터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내세웠으며, 그 후 지금까지 조선이라는 동일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데, 단지 군장이 어느 혈통인가에 따라 단군조선, 기자조선, 이씨조선 등으로 구분하여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삼조선은 단군조선에서 분할하여 분조된 나라이지만, 형식적으로 단군 휘하에 속하고 있어 단군조선으로 구분해야 하며, 대부여와 부여는 단군조선의 혈통이지만 단군에서 완전히 분리하여 새로 성(姓)을 내세웠기 때문에 단군조선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2) 중국의 창조신으로 추앙받는 복희(伏犧)는 원래 신시(神市)의 신하로서 지금의 산동 서남부 지역에 가서 진(陳)나라를 세워 통치하다가 여와(女와)에게 나라를 물려주게 된다. 이 진나라 지역이 치우가 중원을 공략하면서 발판으로 삼았던 곳이고, 그후 단군조선 때 남국(藍國)으로 불리면서 치우의 후손들은 남진하여 오월(吳越) 나라를 세우고, 뒤이어 강남의 삼묘족(三苗族)과 합세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데 산동의 진 나라 지역을 진대(秦代) 서불(徐市)의 옛 고장이었던 낭야(琅耶)로 칭한 것이 분명하여, 복희의 진(陳)이 곧 낭야이자, 회대(淮岱)의 서이(徐夷)의 뿌리와 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후기 단군 때에 번조선(番朝鮮)은 산동 북쪽에 있었으며, 도이(島夷)는 곧 회대를 말한다.

  1. 이이제이(以夷制夷) (上古時代 - 以夷制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