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교당 - arcturus9/useful-link GitHub Wiki

  • 우교당 구치용의 생애와 사상
    https://www.earticle.net/Article/A259246
    이 글은 우교당(于郊堂) 구치용(具致用, 1590~1666)의 생애와 사상을 정리한 논문이다. 구치용은 전북 전주에서 가까운 북쪽 고산(高山)에서 선조 23년에 태어나서 현종 7년까지 거의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살다가 7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42세(1631) 때 복천(復泉) 강학년(姜鶴年)과 함께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로 들어가 수업하였다. 󰡔우교당유고(于郊堂遺稿)󰡕에 실린 글을 통해 그가 교유한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인조(仁祖)의 반정으로 소외된 소론과 남인 세력이었고, 출사를 포기하고 은둔하거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한미한 사람들이었다. 고산에 은거하면서 구치용은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활동도 하였으나 그리 활발하지는 못했고, 늘 빈궁하게 살면서도 주변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하였다. 그가 주석한 성리학서들이 여러 종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없고, 그의 󰡔유고󰡕에는 시들과 편지, 제문, 만사 등만이 남아 있다. 그가 남긴 시와 편지들은 시사적인 내용이 아니며, 교유한 인물들과의 즉흥적 감상과 유람한 곳의 정취, 주변사람들의 안부 등을 5언 또는 7언의 형식으로 쓴 한두 수 정도의 짧은 것들이다. 일상의 내용들을 시의 형식으로 표현해 낸 것이다. 그러나 심서규에게 보낸 49살 때의 편지에서 짧지만 강렬한 철학적 사유의 단서를 보여줬다. 그것은 퇴계 이황이 열었고, 여헌 장현광이 진전시킨 리와 기 각각의 동정론을 계승한 것으로 장현광 이후 장현광의 이론이 그의 제자에게서 또렷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며 특히 지역적으로는 전주권 고산지역에서 장현광의 학설이 전파되는 창구였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家狀)」을 쓴 손자 구정래는 할아버지의 학문과 인생관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을 폭넓게 연구하여 질의하는 것이 많았으나 도리어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려는 의지가 더욱 두터웠다. ‘정심성의(正心誠意)’ 네 글자를 벽에 걸어 놓고 매일 저녁 언행을 독실하게 하면서 홀로 깊이있게 연구하였다. 가난했으나 근심하지 않았고 나이를 먹어도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항상 박문(博文)에 힘써 서적을 모으고 집필하여 500여 권에 이르렀다. 한결같이 머무는 방은 조용하였는데 좌우에 상아 꼬리표를 해놓고 날마다 남당(南塘)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을 한 번씩 외우며 스스로 경계를 삼았다. 항상 먼동이 틀 무렵 일어나 의건(衣巾)을 바로하고 책상 앞에서 사색하기를 늦은 밤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병이 났거나 손님이 찾아온 때가 아니면 그만둔 적이 없었다. 제사를 삼가 받들기를 극진히 재계하여 반드시 조상을 뵌 것 같은 정성을 다하였다. 집안사람들을 깨우쳐 예법을 따르게 하였기에 집안 자제들이 분명한 질서가 있었고 늘 단정하였다. 존심성찰(存心省察)하여 고요한 상태에서의 수양[靜養]이 날로 풍부해졌다. 얼굴빛은 온화하면서 흘러넘치지 않았고, 말은 간략하면서도 각박하지 않았다. 사람들과는 경쟁하지 않았고 대할 때마다 따뜻하였기에 마을의 어른이나 아이들에게 모두 환심을 얻었다. 평생 산수(山水)에 미쳐 바위나 샘을 찾아 유람하면서 소요하며 술 마시고 시를 읊었다. 언제나 바람 불고 꽃피고 눈 내리고 달이 뜬 날에는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수양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가는 곳마다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막힘없이 표현하여 그간 읊은 시가 700여 수에 이르렀고 한 다발로 묶어 그 겉면에 ‘한중유흥(閒中遣興), 취리언지(醉裏言志)’라 제목을 달았다. 고산현의 치소가 있는 동쪽 교외에 살았는데, 복천 강학년이 와서 그 집벽에 ‘우교당’이라 적어 주었기에 그때부터 사람들이 우교당선생이라 불렀다.”

구치용은 동인(남인)계 학자였지만 그가 교유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그가 당색에 연연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소론의 대표적인 학자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남긴 「만사(挽辭)」를 보면 구치용이 당색 구분 없이 남구만과 40여 년의 나이 차이에도 우의를 가지고 교유했던 것을 알 수 있다.

<前參判南九萬> <전 참판 남구만>

夫子不遐棄, 선생은 멀리 버리지 아니하고 交遊四十年, 40년의 나이 차이에도 교유하였는데 許心無貌敬, 공경하는 얼굴빛이 없도록 마음을 허락하였지만 傾肺有精虔. 마음속으로는 깊은 경건함이 있었네. 問訊纔三日, 문안을 여쭌 지 3일만에 音容忽九泉, 갑자기 구천에 가셨구나 白頭愁獨立, 흰 머리로 홀로 서는 것을 근심하여 揮涕向秋天. 가을하늘에 눈물 뿌리네.

남구만은 숙종 때 소론의 거두였다. 그는 충남 홍성의 결성(結城)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었던 송준길(宋浚吉)에게 수학하였고, 1656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1679년(숙종 5) 한성부 좌윤 시절에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윤휴(尹鑴, 16171680)가 소나무를 사사로이 베어 집을 지은 사실과 허적(許積, 16101680)의 서자 허견(許堅)의 비리 등 남인들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오히려 거제도와 남해로 유배된 적이 있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도승지로 조정에 복귀해 대제학, 병조판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노론에 맞서 희빈 장씨를 두둔하였고 장씨가 인현왕후의 제거를 위해 장희재와 주고받은 언문 편지로 인해 장희재가 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세자의 외숙임을 생각해 그의 목숨을 살리는 데 일조하였다. 이로 인해 남구만은 노론을 비롯한 유생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일생을 보내다 83세에 죽었으며,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구치용은 남구만보다 39세 연상이지만 그의 「만사」에 40년을 교유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알고 지냈던 것 같다. 남구만은 「찬성장현광비(贊成張顯光碑)」까지 남겼는데 소론으로서 남인의 산림(山林)인 장현광에 대해 비문을 남긴 것으로 보면 남구만 자신이 남인과의 거리를 그리 크게 두지 않았던 것 같다.

... 스승인 장현광에게 올린 편지에 따르면 그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으며,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저는 세상과 담을 쌓고 궁벽하고 누추하게 살면서 본성이 본래 비딱하고 나약하며 배움도 지리멸렬하여 남들과 대면하여 할 만한 말이나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매번 어리석게 여기지 않는 은혜를 지나치게 입어 때로 칭찬과 권면을 더하시지만 스스로 황송한 사귐을 깨닫지 못합니다. 요즈음 한두 학생에게 의지하여 서로 함께 󰡔어류통편󰡕 등을 열람하고 있는데 난해한 곳이 많아서 의심스러운 뜻을 집록하고 순서를 잡아 올립니다. 한 구 한 구 상세히 분석하여 저의 미혹함을 깨우쳐 주심이 어떠하십니까? 속기를 떨쳐내고 골몰하지만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기약이 없고, 호남과 영남의 길은 멀어 달려가 모시는 일이 쉽지 않으나 마음만은 바람타고 달려갑니다.”

... 일자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편지 중에 구치용이 심서규(沈瑞奎, 1617~1641)에게 준 편지가 있는데, 여기에서 구치용의 학문세계를 맛볼 수 있다. 1638년(인조 16) 5월 24일의 편지로 구치용이 49세 때 보낸 것이다. 사유의 전체 규모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장현광의 논의를 수용하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지난번에 말한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움직이는 세계[動處]에 속한 것이라고 말한 것 등은 근거가 없는 듯하지만 가만히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마음에 두고 탐구해보면, 이는 마른 나무나 다 탄 재와 같은 물건이 아니다. 움직임을 만든다고 말해도 안 될 것이 없다. 대체로 4덕의 체용(體用)은 지극히 작고도 지극히 커서 실로 듣고 본 정도의 지식이나 옹졸한 말로는 헤아려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제 망령되게 하는 말이 스스로 헤아리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앞서 한 말이 조급하고 가볍게 한 것임을 후회하지 않을 뿐더러 또한 억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여긴다면 소경의 눈에 아무런 상이 없어서 갈팡질팡하며 마냥 깜깜한 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지만 성 가운데 원래 이 4덕의 이치가 없고 곧바로 측은과 수오 등의 마음으로 4덕의 전체로 삼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실제로 은을 쇠로 부르거나 옥을 가리켜 돌이라고 하는 비유가 아니다. 더욱 좌우에서 그것에 마음을 조금 두기를 원한다. 직시하지 않으면 도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불가한 것이 있다면 하나하나 반박하여 바로잡아 준다면 내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감히 고치기를 꺼리겠는가. 게다가 근세에 학문에 뜻을 둔 자들을 보면 또한 인의예지가 어떤 일[物事]이 됨을 알 수 있지만 그 일용상행(日用常行)의 도에 있어서 도리어 말한 바와 서로 크게 모순되어 끝내 실천으로 옮기는 실질이 없으니 어째서인가? 입과 귀로 하는 학문만 알고 실행으로 보완하지 않는다면 한바탕 대탈공(大脫空)을 만드는 것이니 이것이 내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며 또한 좌우에서 나아가 본받기를 바라는 점이다. 내 보기에 좌우에 수려한 자질을 가진 총명하고 뛰어난 인물들이 우리 (전라)도에 15-6명이 있는데 고서를 보거나 의리를 강구할 때 실로 그들이 박식하거나 정밀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정자는 ‘만약 존양하지 않는다면 다만 말뿐인 것이다’라고 하였고, 증자는 ‘나는 매일 나 자신에 대해 세 번 반성한다’고 하였고, 주자는 ‘이는 증자가 만년에 덕에 나아간 공부이다’라고 하였다. 학자라면 마땅히 일에 따라 성찰해야 하는데 다만 지금 제일 먼저 착수해야 할 것을 두 번째에 둘까 두렵다. 나는 나이들고 의지도 쇠약해서 이미 할 만한 일이 없지만 오히려 속사(俗士)와 부유(腐儒)들이 알 수 있는 것도 알지 못하니 하물며 좌우에서 말하는 대두뇌처(大頭腦處)를 감히 한번 달려가 이루기를 바라겠는가? 다만 청양(靑陽)의 역려(逆旅, 여관)에서 늙은이의 아득한 한탄만 있을 뿐이다. 오직 좌우에서 더욱 더 존양성찰(存養省察)의 공부를 더하여 그 총명하고 수려한 자질을 보충하여 성취한다면 추락한 우리 사문(斯文)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두 가지의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면 마음과 입이 서로 호응하지 않아서 연구하여 밝히는 이유가 헛되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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